[맞수 기업 열전] ‘TTL’같이 성공하고 ‘쇼’처럼 도전하라



도전과 응전을 통해 10년간 통신업계 맞수로 커간 SK텔레콤과 KTF

▣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1999년 여고생 임은경의 끝없이 신비롭고 한없이 맑은 눈망울을 담은 ‘스무 살의 TTL’이 나온다. 한국통신프리텔 사람들은 절망한다.

2007년 얌전한 복장의 서단비가 흥에 겨워 온몸을 흔들며 “쇼를 하라”고 외쳐댄다. SK텔레콤 사람들은 좌절한다.

도전과 희망은 절망과 좌절에서 시작하는 법. SK텔레콤과 KTF. 그렇게 두 회사는 지난 10년 동안 ‘도전’과 ‘응전’을 통해 통신업계 맞수로 커가고 있다.

△ KTF의 ‘쇼’ 광고와 KTF 본사 건물 전경.


‘특혜 시비’로 이동통신 사업권 반납


SK텔레콤은 공기업을 인수해 출발했다. 물론 진통은 있었다.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92년 8월 말 어렵사리 따낸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을 7일 만에 반납한다고 선언한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사돈이라는 이유로 특혜 시비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소탐하지 않는 통 큰 결단을 한 셈이다. 선경은 전략을 바꿔 한국이동통신 인수로 방향을 돌린다. 하지만 한국이동통신은 주식을 인수하는 방식이어서 막대한 인수자금이 들 것으로 예상됐다. 선경은 김영삼 정부 때인 94년 1월 공개입찰에서 주당 33만5천원이라는 상상을 뛰어넘는 금액을 써넣었다. 이동통신이 차세대 먹을거리 사업이 되리라는 전략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경은 한국이동통신을 품에 안았다.

최태원 회장은 “당시 미주 경영기획실에서 근무했는데 미국에선 독점 통신기업인 AT&T가 분할되며 이동전화가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선경그룹이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분야여서 이동통신 사업에 나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아버지에게 전했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시대의 흐름을 포착한 것이다. 97년 한국이동통신은 SK텔레콤으로 이름을 바꾼다. 98년 1월 선경은 SK 브랜드를 남기며 4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KTF는 공기업 자회사에서 시작했다. 96년 한국통신(현 KT)이 개인휴대전화(PCS) 사업권을 따면서부터다. 한국통신은 자회사 한국통신프리텔을 만들어 이동통신 사업을 전담하게 했다. 시장 반응은 차가웠다. 과연 공기업 자회사가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민간 기업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을지에 대한 불신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꾸려진 조직은 패기에 넘쳤다. ‘한번 해보자’는 열의와 의욕에 차 있었다. 농담처럼 ‘한때 한국통신의 자회사였던 한국이동통신을 되찾아오자’는 농담 같은 진담이 화두였다.

한국통신프리텔은 창립 당시 사장을 포함한 임원진이 모두 40대였다. 젊은 층이지만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전문가였다. 마케팅과 유통 담당 임원은 공개모집을 통해 외부에서 영입됐다. 민간 기업의 경쟁 마인드와 체제를 도입하기 위해서였다.

곧바로 한국통신프리텔이 치고 나왔다. 97년 7월 고객의 초기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가입보증금과 보증보험금을 받지 않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당시 휴대전화에 가입하려면 20만원의 가입보증금을 내야 했다. 때문에 휴대전화는 주로 사업가들의 전유물이었다. 곧바로 가입비, 기본료, 통화요금 등 서비스 요금의 가격 파괴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이상철 초대 KTF 사장(현 광운대 총장)은 “PCS 이전 이동전화가 일부 계층을 위한 서비스라고 한다면 PCS는 서민층을 파고 들어갔다”고 회상했다. 결국 한국통신프리텔은 98년 4월 100만 가입자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지켜보는 SK텔레콤은 착잡했다. 젊은 층한테서 ‘늙은 011’로 대접받기 일쑤였다. 브랜드 가치는 물론 조직 전반의 활력도 떨어졌다. 당시 표문수 부사장은 직접 서울 대학로와 신촌을 돌아다니면서 젊은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조사했다. 젊은 층에선 SK텔레콤이 요금, 단말기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20대에 어울리지 않는 제품’으로 드러난 셈이다.


SKT ‘스무 살 겨낭’ KTF ‘영상 통화로 판갈이’


SK텔레콤은 젊은 층의 가입 특성, 통화 패턴, 납부 방법 등을 분석해 젊은 층의 감성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상품을 선보인다. 99년 7월 ‘스무 살의 011’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TTL’이 바로 그것이다. TTL은 서비스 개시 5개월 만에 가입자 100만 명을 확보했다.

△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주식회사 현판식 모습과 SKT ‘TTL’광고.

TTL요금제는 신세대의 통화 패턴에 맞게 지역할인, 지정번호, 커플요금제 등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인기 몰이를 했다. 광고는 신비감과 호기심을 자극했다. TTL의 성공은 99년 SK텔레콤이 이동전화 가입자 1천만 명 고지에 올라서게 하는 지렛대 구실을 했다.

97년 시작된 이동전화 5개사의 치열한 경쟁은 99년 하반기부터 인수·합병(M&A)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SK텔레콤은 99년 12월 포스코와 주식을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신세기 이동통신을 전격 인수한다. 2000년에는 한국통신프리텔이 무리한 경쟁으로 투자 부담과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솔PCS를 사들인다. 한국통신프리텔과 한국통신엠닷컴은 2001년 KTF로 조직을 통합하며 전열을 가다듬는다.

두 회사의 광고 경쟁도 쏠쏠했다. SK텔레콤은 ‘어디서든 잘 터진다’를 내세우며 KTF와 차별화해 나갔다. KTF는 기업 이미지를 ‘젊음’과 ‘도전’으로 정해 ‘KTF적인 생각’을 담아냈다.

SK텔레콤의 ‘산사’ 편 광고. 고승과 탤런트 한석규가 함께 대나무 숲을 거닐다 정적을 깨는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한석규가 겸연쩍은 듯 휴대전화를 끄고 다시 스님을 따르는 장면, 이어 온화하게 퍼지는 스님의 미소와 함께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멘트로 마무리한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내세워 무분별한 휴대전화 문화에 일침을 찌르면서 수준 높은 휴대전화 문화를 제시했다.

KTF의 ‘넥타이와 청바지’ 편. 승용차를 탄 노신사 옆으로 청바지 차림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젊은이가 지나간다. 노신사는 못마땅한 기력이 역력하다. 장면이 바뀌며 한 사무실. 사장실 문을 여니, 아까 차에서 보았던 젊은이다. ‘넥타이는 청바지와 평등하다.’ 배우 안성기의 “KTF적인 생각이 대한민국을 움직입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기존의 사고를 가진 중후한 신사를 SK텔레콤으로,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젊은이를 KTF로 비유한 광고였다.

2007년 KTF가 반격을 한다. 작전명은 ‘쇼’였다. 준비는 치밀했다. 2세대(음성통화)에서 가입자 수 절반을 확보하고 있는 SK텔레콤을 따라잡기 힘들다는 판단에 따라 3세대(영상통화)로 ‘시장의 판을 바꾸자’는 전략이었다. SK텔레콤으로선 3세대 시장의 확산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2세대 시장의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전략을 썼다. 유석오 KTF 상무는 “쇼를 앞세워 3세대 시장을 주도하는 한편, SK텔레콤을 끌어들여 3세대 시장의 파이를 키운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KTF로선 쉽지 않는 결정이었다. 2006년 집중적인 준비를 할 당시는 3세대에 투자한다고 발표하면 곧바로 주가가 폭락하던 때였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3세대를 택했고, 결국 SK텔레콤도 ‘띵띠~띠리띠’라는 ‘T Live’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우며 KTF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통신요금 담합’ 아닌 선의의 경쟁하길


KTF 가입자 수는 7월 말 현재 1418만여 명. 이 가운데 3세대 가입자는 676만여 명으로 절반에 육박하는 47.6%에 이른다. SK텔레콤의 3세대 가입자 수는 656만 명이다. 3세대 가입자 수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KTF을 SK텔레콤이 뒤쫓고 있는 모양새다. 그동안 ‘응전’했던 SK텔레콤이 ‘도전’하고, 그동안 ‘도전’했던 KTF가 ‘응전’하고 있다.

물론 두 회사의 통신요금 짬짜미(담합)는 자주 문제로 지적된다. 지난 6월 감사원은 “국내 이동통신사들이 막대한 폭리를 취하고 있다”며 ‘요금 개선’을 촉구했다.

하지만 맞수인 두 회사의 선의의 경쟁으로 가격과 콘텐츠 싸움이 불붙으면서 가입비를 비롯해 전반적으로 통신요금이 떨어졌고 콘텐츠와 기술은 올라갔다. 결국 이들 맞수가 있기에 소비자들은 이동통신 강국의 서비스를 체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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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경영인 리더십 비교



조직 지킨 ‘되고송’ vs 추진력 ‘쇼’

 

△ 김신배 SK텔레콤 사장(왼쪽)과 조영주 KTF 사장


김신배 SK텔레콤 사장(왼쪽)과 조영주 KTF 사장은 모두 전문 경영인이다. 젊은 층과 눈높이를 맞추려 노력하는 점도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 사장은 수성형, 조 사장은 창업형의 리더십을 보인다는 점이다.

김 사장은 SK그룹이 혼란스러운 와중인 2004년 3월 취임했다.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태와 소버린의 경영권 위협으로 그룹이 어수선하던 때였다. 김 사장 취임을 앞두고 최태원·손길승 회장이 이사를 사퇴하고, 표문수 사장이 급작스럽게 퇴임했다. 계열사 독립 경영의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 오너일가의 동반 퇴진이 불가피하다는 최 회장의 판단이었다.

김 사장은 가장 먼저 혼란스러웠던 조직을 추슬러야 했다. 김 사장은 국내 시장은 ‘수성’하고, 해외 시장은 ‘공성’하는 양동 작전을 벌였다. KTF의 끊임없는 도전에 응전해야 했고 미국과 중국, 베트남 등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서야 했다. ‘신기록 제조기’인 김 사장은 지난 2005년 매출 10조원을 이룬 데 이어 2006년 가입자 2천만 명 돌파 등 국내 이동통신 부문의 신기록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난 5월 서울 을지로 본사에서 직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김 사장은 “CEO라는 게 외로워질 때면, 여러분과 한 잔 하면 되고~♬”라며 ‘되고송’을 멋들어지게 불러 직원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조영주 사장은 2005년 7월 사장 자리에 올랐다. 취임 일성은 “1등 KTF를 만들자”였다. 조 사장의 뚝심과 추진력은 ‘쇼’를 통해 고스란히 발휘되고 있다. 2006년 9월 임원회의에 3세대 브랜드가 5개 올라왔다. ‘W’ ‘쇼’ ‘Vyond’ ‘WHAT?’ ‘Wing’이 그것이다. 사실 실무진들은 이미 ‘W’로 결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소비자 호감도 조사 결과에서 1위로 나왔기 때문이다. 회의를 주재한 조 사장은 임원들에게 물었다. 시장조사 결과를 토대로 ‘W’가 안전할 것 같다는 의견이 절반을 넘었다.

하지만 조 사장은 “쇼가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쇼’라는 단어에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는 일부 지적이 나왔다. “쇼하고 있네” “쇼하네”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는 젊은 층에 다가섰고, 대박을 터뜨렸다.

조 사장은 실제로 ‘쇼’에 강하다. 지난해 11월 재즈 공연 <윤희정&프렌즈> 무대에서 프랑스 가수 이브 몽탕의 <고엽>을 부르며 재즈 가수로 깜짝 데뷔한 적도 있다.




Posted by (쑨) :
창조적 효과 만점 … 문제 해결에도 ‘굿’


http://la1212.tistory.com

  2006년 가을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유럽 지역 고위 임원들이 참석한 한 회의에서 당시 MS 영국법인 최고기술책임자(CTO)였던 스티브 클레이턴은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 대신 낙서(삽화) 한 장을 내보였다. 파란색 괴물 옆에 ‘마이크로소프트여,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면 차라리 집에 가라’는 도발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다. 뜻밖의 낙서에 잠시 숨을 죽였던 임원들은 정신을 차리고 회사의 진로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잘 정리된 회의 자료보다 한 장의 낙서가 임원들을 자극해 적극적인 회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누가 낙서를 시간낭비라고 했는가. 미 경영 전문지 비즈니스위크는 “낙서는 이제 창조적 기업 경영의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전했다.
 
  낙서는 손에 잡히지 않는 생각을 시각적으로 풀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바람직한 도구다. 종이에 스케치를 하거나 화이트보드에 낙서를 하면서 복잡한 생각을 단순화하고 추상적인 사고를 현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해한 문제를 다루는 골치 아픈 회의에서 익살이 담긴 한 장의 낙서가 참석자들의 시선을 붙들어 매 효과적인 해결책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인포시스 컨설팅의 스테판 프렛 대표는 “낙서는 만인의 공통어”라며 “사람들은 글로 가득 찬 긴 프레젠테이션을 볼 때 잠이 들곤 하지만 내가 보드에 그림을 그리면 집중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 리더들이 모여 한 해 경제를 전망하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 참석, 토론을 벌일 때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냅킨에 그림을 그리며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기도 했다. 실제로 유능한 임직원들 가운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낙서’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광고 대행사인 마틴 에이전시는 지난해 UPS의 TV 광고를 맡았다. 당시 광고 제작 감독을 맡은 앤디 아줄라는 펜과 화이트보드로 UPS가 고객들에게 전달해야 할 핵심 메시지를 도형화해 보여줘 효과를 봤다. 아줄라는 “UPS의 경우 많은 사안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며 “UPS 경영진에게 간단한 낙서로 큰 개념을 설명하고 복잡한 메시지를 빠르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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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웨스트항공 창업의 씨앗이 된 냅킨의 낙서)

  사우스웨스트 에어라인의 창업은 대표적인 ‘낙서 경영’의 사례다.

  1967년 텍사스의 기업인 롤린 킹은 그의 변호사인 허브 켈러허와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다 냅킨에 낙서를 하며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샌안토니오 휴스턴 댈러스 등 세 도시의 이름을 적고 이를 삼각형 모양으로 연결해 봤다. 이 도시들을 운항하는 대형 항공사들은 가격이 비싸고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해 소비자들의 불만이 높았다.

  무심결에 그린 작은 삼각형 낙서로 1971년 킹과 케러허는 사우스웨스트항공사를 창업했다. 저가와 정시 운항을 앞세운 사우스웨스트항공은 지난 30년간 흑자를 내며 저가 항공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미 댈러스에 있는 사우스웨스트항공 본사 벽에는 아직도 삼각형이 그려진 이 냅킨이 걸려 있다.


구글의 성공에도 낙서판이 ‘한몫’

  세계 최대 검색엔진 구글의 성공 뒤에도 낙서판이 있었다.

  구글은 회사 내 두 곳에 대형 화이트보드를 설치, 아무 직원이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끼적거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세계 석권을 위한 구글의 계획’이라는 슬로건이 적힌 대형 화이트보드는 직원들이 이런저런 농담이나 만화 등을 적도록 한 일종의 낙서장이지만 기발한 아이디어의 산실이기도 하다. 구글의 주력 상품으로 떠오른 G메일과 뉴스 서비스의 초기 모델도 이 화이트보드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자유로움의 상징인 낙서는 이제 상품 디자인에도 응용되고 있다. LG전자는 최근 낙서 예술가로 유명한 키스 해링의 디자인 작품을 초기 화면 배경에 탑재한 터치스크린폰을 선보이기도 했다.


유병연·한국경제 기자 yooby@hankyung.com
입력일시 : 2008년 3월 11일 10시 37분 37초
 http://www.kbizweek.com/cp/view.asp?vol_no=641&art_no=34&sec_cd=1658
Posted by (쑨) :
“주가 떨어졌다, 자사주를 매입하라”

2008.02.04 02:45



현대重 대신증권 등 “주가 부양 - M&A방어 두 토끼 잡기” 속속 지분 늘리기


《최근 주가가 폭락한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의 자사주(自社株) 매입이 가속화되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현대중공업 대신증권 코리안리 대한해운 등이 자사주 매입에 나섰다. 포스코 이구택 회장과 이동희 부사장도 모두 15억여 원을 들여 포스코 주식을 샀다. 이들 기업 중 상당수는 현 경영진 지분을 포함한 우호 지분이 적어 상대적으로 인수합병(M&A) 공격에 취약하다. 증권업계에서는 상당수 기업이 하락장을 ‘경영권 방어’의 호기(好機)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싼값에 자사주를 사 두면 경영권이 위협받을 때 이를 우호 세력에 팔아 우호 지분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사주 취득 확대와 맞물려 이달 임시국회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제출한 M&A 방어법안도 주목받고 있다.》


○ 주가 작년 최고점 대비 30% 떨어져

대신증권은 지난달 30일 459억 원을 들여 200만 주의 자사주를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1일 종가 기준으로 주가는 2만4600원으로 지난해 최고점 대비 37.7% 하락했다.

대신증권은 이어룡 회장 등 특수 관계인의 지분(3.91%)을 비롯해 우호 주주의 지분이 27% 정도. 대신증권 노정남 사장은 “최근의 자사주 매입은 매년 이익의 일정 부분으로 자사주를 사 직원들에게 나눠 주는 ‘주식인센티브제도’를 운영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분을 좀 더 확보한다는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재보험사인 코리안리도 지난달 30일 284억2093만 원을 들여 자사주 269만 주를 취득하기로 했다. 코리안리는 박종원 사장 등을 포함한 특수 관계인의 지분이 29.96%. 1일 현재 코리안리 주가(1만850원)는 지난해 최고점 대비 32.2%가 빠졌다.

우호지분이 30% 정도인 것으로 알려진 포스코의 주가는 지난해 76만5000원까지 올랐지만 1일 51만1000원으로 마감됐다.


○ 외국인 지분 낮아져 유리한 환경

증시 전문가들은 우호 주주의 지분이 40% 이상 되면 경영권 방어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적어도 30%는 넘어야 안전한 수준으로 평가한다.

최근처럼 주가가 낮아지면 가격 부담이 적어 외부 세력이 M&A를 시도하기 쉬워진다. 이 때문에 우호 지분이 상대적으로 적은 기업들은 자사 주식을 사들여 주가를 떠받치는 동시에 지분도 확보하는 것.

한 펀드매니저는 “포스코는 지난해 상당한 경영권 위협을 느꼈다”며 “주가가 지금보다 더 떨어진 상황에서 ‘기업 사냥꾼’들이 높은 가격으로 공개 매수에 나서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다. 비록 사들인 지분은 적지만 주요 경영진이 움직인 것으로 볼 때 포스코가 경영권 방어에 신경 쓰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근 외국인의 ‘팔자’ 공세로 외국인의 지분이 낮아짐에 따라 경영권 방어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는 의견도 있다.


○ ‘적대적 M&A 방지법’도 변수

이달 임시국회에 제출돼 있는 상법 개정안도 기업 경영권 방어의 새로운 변수다. 적대적 M&A의 방지를 주요 내용으로 한 이 개정안은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 등이 제출했다. 이 개정안은 적대적 M&A가 발생했을 때 이사회의 결의만으로 적대적 M&A에 나선 ‘공개 매수자’ 외의 주주들에게 신주(新株)를 저가(低價)에 대량으로 발행할 수 있는 ‘신주 예약권 제도’와 우호 주주에게 보통주식보다 의결권이 많은 주식을 발행할 수 있는 ‘차등 의결권 제도’ 등을 담고 있다.

마이다스에셋자산운용 조재민 대표는 “적대적 M&A 방지법이 도입되면 재계는 경영권 방어를 위한 ‘철통 방패’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측이 최근 “경영권 보호 강화는 주주평등권을 침해하는 등 세계적 흐름과 맞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여 최종 통과 여부는 불투명하다. 또 개정된 법의 적용을 받으려면 각 기업이 주주총회를 열어 정관을 바꿔야 하지만 주주의 동의를 받기 어려워 기존 기업들이 실질적 혜택을 누릴 가능성은 적다는 의견도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 서동우 변호사는 “이미 상장된 기업은 기존 주주로부터 동의를 다 받아 내기 어려울 것”이라며 “개정법의 혜택은 새로 상장하는 기업이나 비상장 기업이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들어 자사주를 매입한 기업들
기업 주식(만 주) 금액(원)
현대중공업 228 6521억
대신증권 200 459억
코리안리 269 284억2093만
대한해운 25 300억
현대약품 20 82억6000만
금호전기 10 26억5000만
대한전선 100 413억
S&T중공업 100 86억
다우기술 70 53억9000만
나자인 100 23억9000만
한국카본 20 13억7800만
자료:금융감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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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Posted by (쑨) :


[해외리포트] 금융, 물류 매력 여전... 그러나 높은 중국 의존도가 암초 될 수도


조창완 (choga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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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의 거리에서 본 홍콩섬의 야경. 
ⓒ 조창완  홍콩

'별들이 소곤대는' 밤 풍경을 기대하고 홍콩에 온 이들은 빅토리아산에서 바라본 홍콩의 밤 모습에 실망할 것 같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센트럴과 맞은 편 침사초이의 화려한 야경에 입을 다물 수 없기 때문이다. 별들은 야경에 가려 존재조차 찾기 힘들다. 그 스카이라인은 이제 왼쪽으로 계속 확산되어 신제(新界)까지 뻗어있다.

'반환' 10주년을 넘어가는 홍콩은 흥분과 아쉬움이 교차하고 있는 풍경이다. 1997년 당시 홍콩 '반환'을 보는 이들의 전체적인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실제로 저우룬파(주윤발), 리롄제(이연걸) 등의 스타는 물론이고 우위션(오우삼), 쉬커(서극) 같은 감독들이 홍콩을 떠났다. 별이 없는 홍콩은 초라하게 시들어 가는 듯 했다.

하지만 홍콩의 불빛은 그렇게 쉽게 식지 않았다. 그렇다고 홍콩의 미래가 밝은 것만은 아니다. 홍콩이 현재 안고 있는 딜레마와 더불어 동북아 허브를 꿈꾸던 한국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것들을 점검해 본다.


중국 본토에서, 한국에서 끊이지 않는 홍콩행 발길


크리스마스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난해 12월 21일,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넘어가는 곳 가운데 하나인 선전 루오후(羅湖)역의 홍콩 입국 신고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은 단계적으로 오픈할 때마다 위험한 광경을 연출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옆에 있는 외국인 입국장도, 이보다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1시간은 경과해야만 홍콩으로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사람이 많다. 물론 그 옆에 있는 홍콩 거주자들을 위한 창구는 거의 줄을 서지 않을 만큼 빠르게 통과가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루오후 세관을 통과하는 출국자는 하루 10만명 정도다. 하지만 이는 휴일이 되면 20만명으로 늘어나고, 최고점에 달하는 춘지에(春節) 기간은 80만명까지 치솟기도 한다.

홍콩을 향한 발길은 이곳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중경삼림>에 나오던 도심에서 란타우섬의 북쪽으로 옮겨간 첵랍콕 공항도 쉴 새 없이 붐빈다. 지난해 12월말에 인천과 홍콩라인은 대부분 만석이었고, 단체 여행객의 항공권을 확보하려는 여행사들은 곤욕을 치렀다.

올 10월까지 한국인의 홍콩 출국 수(관광공사 제공 자료)는 2003년 19.5%의 감소세를 보이다가 다음해부터 증가세로 돌아섰고, 올 10월까지 누적 출국자는 69만4777명으로 20.8%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 증가세는 일본(24.3% 성장), 중국(25.4% 성장), 마카오(35.2% 성장) 경우보다는 못하지만 대만(14% 성장), 태국(1% 감소), 말레이시아(16.7% 성장), 싱가포르(1.4% 성장) 경우보다는 훨씬 높은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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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층 버스를 타고 홍콩섬을 관광하는 여행객들. 
ⓒ 조창완  홍콩

사람들은 왜 홍콩으로 향할까. 홍콩의 여행지들에 가면 그 흐름을 직감할 수 있다. 30년째 홍콩에서 가이드생활을 한 코니리씨는 "야경을 보는 픽트램이든 바가 있는 주말의 침사초이나 난콰이펑이든 간에 한국의 젊은 여행자들로 넘쳐난다, 원래 난콰이펑은 홍콩에 정주하는 사람들에게만 고객카드를 만들어줬는데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가면 그냥 카드를 만들어 준다, 그들은 하나같이 3번 이상만 홍콩을 왔다 가면 마약에 빠지듯 홍콩 마니아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을 홍콩 정부는 다른 어느 곳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 때문에 연말 같은 성수기에 크리스마스 축제를 만들어서 여행객들을 끌어들인다. 사실 기자가 이번에 본 홍콩은 공항에 약간의 장식이 있고 시내 호텔 등의 로비에 관련 선전물 등이 조악하게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인은 물론이고 여행을 좋아하는 중국인이 홍콩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려는 욕망을 자극했다. 이 때문에 12월말부터 침사초이나 홍콩섬의 주요 호텔은 모두 동이 났다.

홍콩의 경우 한국에 버금가는 일반 물가와 좁은 도로망 등으로 인해 여행요소는 상하이나 베이징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패키지여행의 경우도 좁은 호텔, 빤한 식사 코스로 기분을 상하기 쉽지만 홍콩 여행객들이 끊이지 않은 것은 이미 브랜드가 되어버린 여행도시 이미지와 마케팅의 성공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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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금융인들에게 금, 토요일 밤은 해방구다. 여기에 한국 등에서 온 여행객들이 합류하고 있다. 
ⓒ 조창완  홍콩


금융과 물류는 홍콩의 힘... "홍콩은 매력적인 아시아 전략기지"


빅토리아 거리를 비롯해 센트럴을 중심으로 배치된 홍콩섬 금융사들의 구조는 금융과 황금의 도시 홍콩을 실감하게 한다. 지난달 21일 이곳에 있는 ABN-AMRO와 맥쿼리를 방문했다.

네덜란드계 종합 금융회사인 ABN-AMRO의 사무실은 홍콩 금융가의 중심부인 빅토리아 거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그 주변은 시티은행을 비롯해 홍콩상하이은행, 중국은행 등 세계적인 금융기업들이 밀집된 곳이다. 이 회사는 이미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다양한 파트에서 활동하는 기업이기도 하다.

이날도 한국인 근무자들이 나와서 따뜻하게 맞고 방문 일정을 진행해주었다. 서브프라임 부실 사태로 인해 미국 쪽 금융사들이 휘청대는 반면, 네덜란드계인 이 회사는 영국계 은행인 로열뱅크 오브 스코틀랜드(RBS)와 약 700억 달러 규모의 인수합병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될 경우 세계 최대 규모의 금융회사로 발돋움할 ABN-AMRO의 홍콩 사무실은 비싼 임대료로 인해 공간이 좁긴 했지만, 수백 명의 세일즈 트레이더(Sales Trader)들이 빅토리아만이 내다보이는 사무실에서 자기의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담당자는 서쪽으로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과 접근이 용이하고 동쪽으로는 상하이, 서울, 도쿄와 접근도가 좋아 홍콩을 아시아 전략기지로 삼는 금융사들의 정책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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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섬 중심에 있는 홍콩상하이은행 본점 1층의 광고판. 퇴직 후 설계에 관한 은행 광고를 한 직장인이 보고 있다. 
ⓒ 조창완  홍콩


맥쿼리는 빅토리아만과 붙을 듯 있는 중신대하에 위치한 종합 보험 증권 회사다. 1985년 호주에서 은행업을 시작한 맥쿼리는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라는 틈새영역을 공략하는 전략으로 입지를 구축했다. 인천공항고속도로 등 한국에서도 이미 다양한 투자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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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을 지키는 인민해방군 청사. 폭파가 쉬운 구조로 되어 있고, 이곳 근무자는 가족을 동행할 수 없다. 
ⓒ 조창완  인민해방군


1997년 당시 금융업계에서 홍콩의 중국 '반환'은 우려스러운 사태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일국양제의 홍콩 정부를 그대로 유지했다. 인민해방군이 주둔하는 곳에서 200~3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센트럴의 선착장에서는 아직도 파룬궁 지지자들이 시위를 할 정도다.

그에 발맞춰 홍콩은 정부규제 최소화, 낮은 조세부담률, 사유재산권 보장 등을 유지해 세계 금융 및 비즈니스 센터로서 기반을 구축했다. 세계 40개국의 400여 은행과 321개의 증권사가 진출해 있다.

물론 홍콩의 금융 허브 기능은 홍콩섬의 비싼 임대료 등으로 인해 곤란을 겪기도 한다. 이미 적지 않은 회사가 홍콩섬을 떠나 지우롱(九龍)의 신지에(新界)나 중국 선전, 상하이, 베트남 하노이 등으로 역할을 분산하고 있다.

하지만 초강대기업으로 성장한 중국은행들의 홍콩 사업 확대와 중국 투자의 우회노선인 항셍주식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홍콩의 금융 허브 기능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금융과 더불어 홍콩을 버티는 주요한 힘은 물류다. 공산품에서 농산품까지 대부분의 생활 물품을 수입에 의존하지만 홍콩은 세계에서 물자가 가장 풍부한 곳이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항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첵랍콕 공항에서 빠져나와 거대한 다리를 지나면 도로 왼쪽에 거대한 컨테이너 적체항이 눈에 띈다. 처리 능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콰이청 컨테이너 터미널은 여전히 막강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 부두는 중국 선전과 황강(黃崗) 세관으로 연결되어 홍콩에서 3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중국 정부의 간섭이 적다는 것도 홍콩을 선호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국제중개무역항답게 홍콩 총수출 중 재수출 비중은 88%가 넘는다. 그 배경은 풍부한 자금 지원을 가능하게 하는 금융 분야의 협조와, 사후 신고만으로 통관절차가 완료되는 구조를 홍콩이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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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있는 콰이청 컨테이너 부두. 
ⓒ 조창완  홍콩


중국 본토 항구의 부상, 위협받는 홍콩 물류... 여전히 우울한 콘텐츠산업


하지만 홍콩이 계속해서 그런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이제 거의 없다. 막강한 경쟁 상대들의 부상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홍콩과 인접한 선전(深圳)도 이젠 홍콩에 밀릴 이유가 없다. 선전 바오안공항에 가까운 푸잉(福永)부두를 시작으로 셔코우(蛇口), 푸뎬(福田), 타펑(大鵬)항으로 이어지는 선전의 물류망만으로도 홍콩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광저우, 둥관 등도 물류망을 확대해 가고 있다. 또 상하이나 톈진 등도 갈수록 커감에 따라 홍콩의 가치는 갈수록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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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4위의 부두이자 향후 홍콩의 물류기능을 흡수할 선전항. 
ⓒ 조창완  선전
 

그럼에도 그동안 홍콩이 나름대로의 힘을 발휘한 것은 매년 약 10%씩 성장하는 중국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광저우나 선전이 홍콩에서 오는 사람들의 소비로 도시를 키웠지만, 지금은 역으로 홍콩이 광둥이나 중국 본토에서 오는 사람들의 소비로 영위하는 모습이다. 여전히 존재하는 인건비 차이 등으로 인해 중국인의 홍콩출입은 자유롭지 않지만, 그럼에도 홍콩 마니아가 된 광둥 젊은이들의 홍콩 나들이는 홍콩 관광부흥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였다.

물론 이런 여행 마니아만 있는 게 아니다. 중국 본토에 있는 부자들은 홍콩에 집을 사두는 한편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홍콩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홍콩은 영어를 배우기에 적합한 환경인데다 홍콩에서 아이를 출산할 경우 중국 정부에서 규제하는 독생자녀 제도를 우회적으로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중국 방문자들이 소비하는 양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홍콩에서는 보석 수집가로 알려진 중국 정부 고관의 부인이 방문할 때가 안 팔리는 보석을 팔아치울 호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이런 의존도는 홍콩 경제에 치명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중국 정부가 지금은 홍콩과 마카오의 기능을 인정하고 있지만, 만약 그 기능을 상하이나 베이징, 톈진 라인으로 이전하는 정책을 쓸 경우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홍콩으로서는 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중국 정부도 홍콩의 이런 특성을 알기 때문에 힘의 분산을 '전략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또한 과거 홍콩의 활력소였던 엔터테인먼트나 콘텐츠 생산 기능은 여전히 부활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홍콩 정부는 이런 기능을 살리기 위해 월트디즈니와 합작으로 홍콩 디즈니랜드를 2005년 9월에 개장했다. 하지만 이 기획은 개장 후 1년 동안 500만명을 유치했지만, 그 후 방문자 수가 급감하면서 이젠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규모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훨씬 작았고, 가족 여행객보다는 청년층이 중심이 된 홍콩 여행객의 특성이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1980년대 중반 <영웅본색>(英雄本色, 1986), <첩혈쌍웅>(牒血雙雄, 1989) 등 홍콩 느와르로 불리는 영화와 <천녀유혼>(1987) 등 고전 판타지물로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홍콩 영화는 중국 반환과 함께 소멸하기 시작해 갈수록 그 추락세가 더 심해지고 있다. 거기에 장궈롱(장국영)의 자살과 메이옌팡(매염방)의 사망 등 악재가 겹치면서 홍콩 영화는 사실상의 조타수를 잃었다.

물론 2000년대 초반에는 저우싱치(周星馳)의 <소림축구>나 <쿵푸허슬>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지만, 이런 흐름도 단절된 지 꽤 오래다. 저우싱치는 <장강 7호>(長江7號)를 2008년 1월 31일에 내놓을 예정이지만, 이번 영화엔 홍콩 영화라기보다는 중국 본토영화로 봐야할 요소가 많다.

거기에 지난해 11월 1일 홍콩 영화산업의 상징적인 회사인 골든하베스트(嘉禾)가 청톈(橙天) 엔터테인먼트에 팔리면서 사실상 홍콩 영화는 장례식을 치렀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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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사초이 스타의 거리에 있는 리샤오롱(이소룡) 동상. 
ⓒ 조창완  이소룡


지나친 중국 의존, 홍콩에 독이 될 수도... 한국은?


반환 후 10년 동안 홍콩은 그다지 암울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중국의 후광으로 관광이나 금융, 컨벤션, 물류 등의 장점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콩의 앞날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이미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지난 10년 동안 성장을 거듭했지만, 홍콩처럼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졌다. 중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감기에 걸리는 일은 상식이 되어버렸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치르면 중국은 연간 국민소득 4000불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빈부격차 확대로 서민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또 그 정도 소득 수준은 각 나라에서 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중국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홍콩은 이제 그러한 중국과 운명을 같이하게 됐다. 중국의 홍역을 피해갈 수 없는 한국 역시 중국의 미래에 운명을 맡기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일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때다.
 
 
2008.01.03 20:18 ⓒ

2008 OhmyNews
Posted by (쑨) :


알파걸은 왜 알파우먼이 되지 못할까


 

매일경제|기사입력 2007-12-0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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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났거나, 잘 나가는 여성들을 가리키는 여성상위시대, 여풍(女風)이란 말은 더이상 새롭지 않다.

요즘은 이런 여성들을 ‘알파 걸(α-Girl)’이라고 한다.

알파걸은 댄 킨들러 하버드대 아동심리학 교수가  2006년 ‘새로운 여자의 탄생-알파걸’이라는 책에서 만들어낸 말. 어려서부터 부모의 관심과 전폭적인 지원 속에 학업,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성보다 월등히 뛰어난 엘리트 여성으로 성장하고 있는 소녀들로 이전 세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여성집단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알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차별이 줄어들면서 우리 사회에도 알파 걸들이 많아졌다. 딸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딸을 알파 걸로 키우려고 갖은 정성을 쏟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파 걸들 중 과연 몇 명이나 알파 우먼이 될 수 있을까. 나이가 올라갈수록 알파 우먼의 숫자는 현격히 줄어든다. 

알파 우먼이 소수라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알파 우먼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공공연한 남녀차별은 사라졌지만, 일상은 여전히 남성위주의 관습과 관행이 지배한다. 능력을 바탕으로 공개적인 경쟁을 거치며 성장한 알파걸들은 드러나지 않는 남성중심 사회의 확고부동한 가치에 순응하기도, 거스르기도 힘이 부친다.

명문대를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취직해 10년간 직장 생활을 했던 조선희(39·가명)씨.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시작한지 몇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회사 시절을 생각하면 심란해진다. “신입사원 시절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연차가 올라가면서 점점 사람들과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주변이 온통 남자들 뿐인 부서에서 일했는데 제가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저를 알게 모르게 따돌리더라구요. 나중에는 후배들까지 은근히 저를 무시하는데 일에서 오는 만족보다 사람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 커지더라구요.”

평생 직장이라고 생각하고 입사했던 조씨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현재 하는 일로 생활은 되지만 자신이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과 전혀 다른 삶은 이따금 심한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역시 일류대를 나오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직장여성 이희수(38·가명)씨도 요즘 심각하게 전망을 고민한다. 일 하나만큼은 빠르고 똑 부러지게 해낸다고 자부하고 10여년 넘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지만 벌써 몇번째 인사 불이익을 당했기 때문이다. “윗사람들은 항상 조직을 위해 인사를 하다보면 개인이 불이익을 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보다 못한 남자 직원들이 승승장구 하는 것을 보면 참기 힘듭니다.” 하지만 마흔이 내일 모레인 대기업 차장급, 그것도 여성인 그에게 전직의 기회는 별로 없다. 눈 높이를 낮추어서 입사하거나 자영업을 해볼까 싶어도 스스로를 다운그레이드 하는 것 같아 당장이라도 회사를 때려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할 수 없이 그냥 다니고 있다. 이씨는 “시험을 보는 거라면 뭐든 자신 있어요. 하지만 사회생활은 아니더라구요. 안좋은 일을 자주 겪다 보니 이제는 자신감도 많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라며 한숨을 쉰다.


■ 쏟아지는 알파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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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와 이씨 모두 요즘 기준으로 보면 알파 걸이다. 어려서부터 똑똑하다는 칭찬을 받았고 실제로도 공부를 잘해 좋은 학교를 나왔다. 부모도 금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전통적 사고 방식을 이따금 경험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차별 받는 일은 겪어 보지 못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분명하게 밝히고, 아니라고 느낄 때 역시 똑 부러지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이런 알파 걸들은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 넘쳐 난다. 

한때 여성 합격자라는 것만으로도 뉴스가 되었던 고시의 경우 여성의 비중은 해마다 늘고 있다. 올해 외무고시 합격자 31명 중 여성은 21명. 역대 최다다. 또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판사로 임용된 90명 중 64%인 57명이 여성이다. 지난달 30일 발표된 행정고시 2차 합격자 310명 가운데 여성 비율 역시 역대 최대인 48.3%(150명)으로 지난해 43.4%에 비해 5% 가까이 늘어났다. 행시 중에서도 핵심으로 꼽히는 일반행정직렬은 120명 가운데 여성이 78명으로 65%를 차지했다.

기업에서도 여성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대 여성의 경우 전체인구 중 취업자를 나타내는 고용률이 59.7%로 20대 남성에 불과 1% 못미친다. 전연령대의 평균 고용률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22.5%나 높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요즘 입사 시험을 보면 여성 응시자들이 남성 응시자에 비해 학교성적이나 외국어 능력은 물론 태도나 자세 평균적으로 훨씬 뛰어나다. 현실적으로 성비를 감안해 남성들을 뽑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실제 국내 대기업 3곳 중 1곳은 대졸 신입사원을 뽑을 때 여성 합격자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막기 위해 남성 지원자를 일정 비율 이상 선발하는 ‘남성 쿼터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온 바 있다.

이런 현상은 세대가 내려갈수록 두드러진다. 일부 외국어고에서는 여자 신입생이 60%를 차지하고 아들 둔 학부모들이 여학생과 내신 경쟁을 피해 남고를 찾아 이사하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다. 또 학급은 물론 전교 회장들 중에도 여학생이 많다. 남학생 회장-여학생 부회장은 완전히 옛말이다. 2005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에서도 중3 여학생이 국어 사회 영어는 물론 전통적으로 여학생이 쳐진다는 수학 과학에서도 평균 성적이 남학생을 앞섰다. 초등학교 2학년 학부모인 김지현(38)씨는 “요즘은 어딜 가도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똑똑하고 적극적이라고 엄마들이 입을 모은다. 남학생 엄마들이 여학생들 때문에 남자들이 기가 죽는다고 고민할 지경”이라고 귀뜸한다.


■ 여전히 소수인 알파 우먼 ■

10대와 20대에서 알파 걸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과 달리 30대가 되면 알파라는 호칭을 붙일만한 여성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 든다. 일례로 알파 걸들이 첫 직장으로 흔히 꼽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경우 여성 임원은 여전히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노동부가 상시 근로자 1000명 이상 기업과 정부투자기관, 정부산하기관 등 613개 사업장(2006년 말 기준)을 대상으로 실시한 ‘남녀 근로자 고용 현황’ 조사 결과 전체 임원 1만6001명 가운데 여성 임원은 613명으로 4.4%에 불과했다. 반면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는 사업장은 조사대상 사업장의 74.1%인 454개에 달했다. 이중 민간기업은 498개 중 349개(70.0%), 정부 투자기관은 14개 중 13개(92.9%), 정부 산하기관도 101개 중 92개(91.0%)에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었다. 또 과장급 이상 관리자 중 여성의 비율도 전체적으로 11.0%에 그쳤다.

또 다른 수치도 있다. 최근 취업포털 커리어가 국내 100대 기업 중 2001년 금융감독원에 사업보고서를 제출한 83개 기업의 근로자수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여성 근로자수는 2001년 9만3820명에서 14만3254명으로 52.7%가 증가해 같은 기간 남성 근로자 증가율 4.5%를 훨씬 앞질렀다. 그러나 같은 기간 남녀 직원들의 평균 임금 격차는 더 벌어졌다. 2001년 대기업 남성 직원(평균급여 3894만원)들은 여성(2413만원)보다 1481만원을 더 많이 받았지만 지난해는 남성 5775만원, 여성 3500만원으로 그 차이가 2275만원에 달했다. 커리어 측은“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는 임원이나 관리직에 여성 비율이 낮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알파 걸은 아직까지는 그야말로 알파 ‘걸(Girl)’일 뿐, 알파 ‘우먼(Woman)’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 세대에 비해 이전 세대에서는 눈에 보이는 남녀차별의 장벽이 훨씬 높았기 때문에 성공한 여성의 숫자가 적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여성으로 하여금 일과 성공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드는 구조는 아직도 굳건하게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사회로 나오기까지 승승장구했던 알파 걸 대부분은 이런 현실에 부딪히게 되고 그중 소수만이 초인적인 노력과 일정 정도의 희생, 그리고 주변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알파 우먼이 될 수 있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지 못할 것이 없다고 여겼던 알파 걸이기에 현실에 무릎 꿇거나 스스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좌절감은 더 클 수 있다.


최근 승진인사에서 불이익을 보았다는 이영윤(40·가명)씨는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나의 실적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누가 말해 준다면 납득이라도 하겠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나를 추스려야 하는지 막막하다“고 괴로움을 토로했다. 최근 30대 여성 우울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 알파 걸을 거부하는 가부장적 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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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알파 걸 대부분에게 능력이나 실적의 문제는 별로 없다. 자신이 맡은 일은 완벽하게 처리해내는 것이 알파 걸 대부분의 공통점이기 때문. 반면 알파 걸에게는 ‘주변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거나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다’는 말들이 꼬리표처럼 따라 붙기 일쑤다.

대기업 부장인 조상욱(50·가명)씨도 부서의 여직원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그는 “상사라도 곤란한 지시를 할 때가 있고, 또 관행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도 있다. 그럴 때 남자 직원들은 대개 알아서 하지만 여직원들은 정색을 하며 문제제기를 한다. 나도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마나 한 원론을 들먹이는 것을 보고 있으면 화가 난다. 그렇다고 남자직원들처럼 불러다 놓고 따끔하게 혼을 내기도 좀 그렇고… 어쩌다 싫은소리라도 하면 여직원들은 대개 얼굴에 금새 표가 난다”고 말한다. 평소 여직원들과 큰 문제는 없지만, 인사평가를 할 때 그의 이런 견해는 그대로 반영이 되게 마련이다. 

같은 전공의 팀원을 물색 중이라는 김영준(42·가명)씨도 마찬가지. 평소 남녀차별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함께 일할 사람으로 여성은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고 털어 놓는다. “딱히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여자는 어딘지 불편해요. 말이 잘 통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극히 적고 무언가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다 큰 사람들끼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능력도 능력이지만, 나하고 같이 호흡이 맞는 사람이 더 중요한데 그러자면 남자가 아무래도 편하지요”라는 것.

이런 생각을 가진 남성들에게는 여성들이 술자리에서 보이는 태도도 불만이다. 술자리에 끼는 횟수 자체도 적은데다 어쩌다 부서화합을 위해 폭탄주라도 돌리려고 해도 “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당당하게 거부하는 것. 조 부장은 “어짜피 술을 먹고 흐트러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친해지기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자들은 좀처럼 그러지 않으려고 하니 사무실에서 쌓인 불만도 해소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지적에 대해 당사자인 알파 걸들은 수긍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인다. 기업체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유은정(38·가명)씨는 “회사는 어디까지나 2차 집단이지 1차 집단이 아니다. 상사를 엄한 아버지처럼 어려워만 해서는 이익을 내는 기업의 목적에 충실할 수 없다. 또 상사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보다 나은 의견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인데 마치 자신에 대한 인격적 모독으로 해석하니 답답할 뿐”이라고 말한다.

유씨의 친구인 김영주(37·가명)씨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사무실에서 할 수 없는 얘기를 술자리에서는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동의하기 힘들다. 술의 힘을 빌어 술자리에서는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인양 굴다가 다음날 아침 아무 결론도 없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했다. 못마시는 술을 몇번 마셔 봤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고 말한다.

양측의 이같은 입장 차이는 각자가 가진 인생관과 가치관의 차이이기도 하다. 전통적 가부장제에 기초한 남성들의 시각에서는 할 말 다하는 알파 걸이 불편할 수 밖에 없지만, 반대로 알파 걸의 입장에서는 합리성보다 권위에 의존하고 술자리를 비롯한 비공식적 채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남성중심적 의사소통이 영 마뜩치 않다.

문제는 아직까지 가부장제가 사회의 근간으로 자리잡고 있고 가부장적 가치에 충실한 남성들이 보다 많은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편집장을 지낸 김신명숙씨는 이를 두고 자신의 책 ‘김신명숙의 선택’에서 “알파 걸들의 앞에는 알파 우먼으로 향하는 거침없는 직선코스가 아니라 가부장제라는 오래된 미로가 놓여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특히 공개적인 남녀차별은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관습적이고 관행적인 가부장제는 여전하다는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다.이런 보이지 않는 남녀차별은 차별을 하는 남성들은 물론이고 차별을 당하는 여성들조차도 뚜렷하게 의식하기 힘들기 때문. 미국에서 1970년대부터 통용된 유리천정(Glass Ceiling·여성의 직장 내 승진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이제 국내에서도 본격화하는 셈이다. 


■ 알파 우먼의 발목을 잡는 육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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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여성의 직장 내 성공을 독려하는 표현으로 “여성이여 프로가 되라”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프로는 아름답다”광고 카피도 있었지만 이런 말들은 현실에서는 구두선에 가깝다.

특히 싱글 때 아무리 잘 나가던 알파 걸이라도 결혼과 출산, 육아를 선택하는 순간 프로로서의 삶은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제약사 마케팅 담당차장인 김현수(38·가명)씨. 연년생 두아이의 엄마는 그는 둘째가 태어난 순간부터 친정과 살림을 합쳤다. 아이들과 살림은 전부 어머니가 맡아서 해주고 생활비를 드리는 식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아프거나 어머니가 몸이 불편하면 언제든 회사에서 달려와야 하는 형편. 밀린 직장일을 벌충하려면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야 하고 주말에도 출근해야 할 경우도 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아이들은 부인에게 일임하고 일에만 매진하는 남자 동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남자와 여자는 같이 출발해도 결국은 여자가 결혼하는 순간 뒤쳐질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한다. 

시어머니와 한집 살림을 하고 있는 박사과정 조연수(42·가명)씨는 요즘 마지막 학기 휴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한학기만 마치면 논문을 써야 하지만, 초등하교 5학년, 3학년이 아이들이 할머니 손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할머니가 아이들이 어릴 때 육아는 가능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교육은 커버가 안되더라구요. 학원을 고르고 데리고 다니는 것부터 학교생활을 도와주는 것까지 다 엄마가 해야하잖아요. 아이를 길러보면 엄마가 붙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얼마나 큰 티가 나는지 모릅니다.” 그나마 도와줄 사람이 있는 경우는 상황이 좋은 편. 한 명까지는 도우미 등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둘째는 엄두도 내기 힘들다.

공부든 일이든 잘해야 스스로 용납이 되는 환경에서 성장한 알파 걸들은 자녀교육에서 소홀한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십상이다. 혹자는 “여성 스스로 수퍼 우먼 컴플렉스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수퍼 우먼 즉 알파 우먼을 지향하며 성장한 알파 걸이 자신의 존재기반을 거스르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지식과 정보에 밝은 알파 걸로서는 아이와 엄마의 유대관계 및 교육이 자식의 인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스스로의 역할을 직장인으로 제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어릴 적 부모가 자신에게 해준 것을 생각하면 최소한 그 정도 수준으로는 자식에게 해주고 싶지만, 전업주부가 대부분이었고 사교육이 횡행하기 이전 자신의 어린 시절과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최근 둘째는 임신해 사직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박연희(35·가명)씨는 “우리 사회는 여전히 남자가 돈을 많이 벌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을 해야 모두가 해피하게, 모든 것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구조 같아요. 엄마가 집밖으로 나가면 엄마도 아빠도 아이들도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 다 불편하고 피곤해지니 이래서 여자들이 어떻게 직장에 나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한다. 

그래서 요즘 직장 여성들은 아무리 잘 나가는 직급에 있다고 해도 육아 이야기만 나오면 “남편 돈 잘 버는 전업주부가 제일 부럽다”고 입을 모은다. 알파 걸 시절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발언이다. 그만큼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기가 벅차다는 얘기다.


■ 알파 우먼 없이는 알파 걸도 없다 ■

그러니 사회 도처에서 알파 걸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는 단순한 사실만 가지고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선뜻 결론을 내리긴 힘들다. 알파 우먼이 되지 못하는 알파 걸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때 잘 나갔던 과거를 가진, 지금은 평범한 여성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뜻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스스로의 성공을 자의반 타의반 포기하게 된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과 열정을 쏟을 곳은 결국 돈 불리기와 자녀교육 뿐이라며 부동산·주식 등 재테크 광풍과 지나친 사교육 열풍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알파 우먼이 되지 못하고 가정으로 돌아간 여성의 상당수가 내 딸만큼은 진정한 알파 걸로 키우겠다며 갖은 정성을 다하지만, 결국 그 딸 역시 가부장적 관습과 육아의 부담이 사회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한 알파 우먼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정부와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아 인구가 줄고 국가 경쟁력이 저하된다며 걱정 어린 소리만 앞세운다. 능력과 자질, 성취욕을 두루 갖춘 여성 인력을 사장시켜버리는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방지할 근본적인 대책은 잘 보이지 않는다.

부모가 만들어준 가정과 성적이 곧 성공을 의미하는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성장한 알파 걸이 사회 속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 알파 우먼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하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알파 걸로 살 수 있을 것인자, 과연 내 딸은 알파 걸로 키워야 하는 것인지. 누구라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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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출마 임박 4대 관전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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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3일 저녁 서울 용산구 이회창 전 총재의 자택 인근에서
이 전 총재의 대선 출마를 반대하는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출마가 기정사실화하면서 대선정국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안개 속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사실상 이명박ㆍ정동영 후보 2파전으로 전개될 것 같았던 대선 구도가 3파전 또는 4~5파전으로 복잡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커졌다. 유권자들이 향후 대선정국에서 눈여겨봐야 할 주요 관전포인트를 짚어본다.

1. 昌 출마해도 완주할까

  이회창 전 총재는 이번주 대선 출마 선언을 하고 5년 만에 다시 정계에 복귀할 것으로 보인다. 출마 선언은 8일께가 유력시되나 심대평 국민중심당 후보와의 연대 논의 등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시기가 다소 유동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변인 격인 이흥주 특보는 4일 "이 전 총재는 현재 경기도 모처에서 장고(長考) 중이며 5일께 상경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지난주 말 수원의 한 지인 집에 머물며 출마 선언을 앞두고 막바지 정국 구상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총재는 출마 선언 후 무소속 또는 연대설이 돌고 있는 국민중심당 후보 중 어떤 형식으로 대선에 나올지 본격 준비작업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이 특보는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국중당 후보로 나올 것이라는 언론기사는 오보"라며 무소속 출마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두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 한 당직자는 "이 전 총재가 `차떼기 정당` 이미지 때문에 스스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는데 또다시 정권교체에 걸림돌이 되는 길을 선택하겠느냐"며 "설사 출마해도 완주는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2. 다급해진 이명박 카드는

  이 전 총재의 출마 선언이 임박할수록 이명박 후보의 행보가 다급해졌다. 이 후보는 이 전 총재의 출마를 만류하기 위해 직접 예방하겠다는 뜻도 전달했다. 그는 지난 3일 서울 선대위 출정식에서 "(이 전 총재를) 찾아가 뵈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 후보가 이 전 총재를 직접 만나 정권을 되찾아올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함으로써 출마 포기를 설득하겠다는 것이다. 임태희 비서실장을 통해 이 전 총재 측에 수차례 방문의사를 전달했으나 아직 긍정적인 답변은 얻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근혜 전 대표에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도 여느 때보다 적극적이다. 박 전 대표와의 화합이 이 전 총재의 출마 포기를 압박하는 것은 물론이고 출마 후에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 후보는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선언한다"면서 "나는 다 잊어버리고 사랑하는데 괜히 쑥스러워 삐죽삐죽하지 말고 함께 가자"고 호소했다. 이 전 총재가 출마할 경우 지지세력 일부가 이탈할 가능성 때문에 내부 단속에도 바짝 신경을 쓰고 있다.

3. 캐스팅보트 쥔 朴선택은

이 전 총재 출마 움직임으로 사실상 가장 몸값이 뛴 것은 박근혜 전 대표라고 볼 수 있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 이 전 총재 사이에서 박 전 대표가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하느냐가 12월 대선은 물론 내년 4월 총선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선 벌써부터 박 전 대표가 향후 정국에 `캐스팅보트`를 쥐었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당장 이 전 총재 여론 지지율이 20% 안팎까지 나오는 데는 영남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한 박 전 대표 지지층과 부동층이 이동한 게 가장 큰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의 한 측근은 "이 전 총재가 아직 공식 출마 선언도 안 했는데 박 전 대표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현재로선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는 입장에서 변한 게 없다"고 말했다.

4. 昌 사람들 누가 합류하나

이 전 총재 진영에 어떤 이들이 합류할지도 관심사다. 현재 이 전 총재를 보좌하고 있는 이흥주 특보와 지상욱 박사, 이채관 비서 등은 선대위에서 주요 직책을 맡을 전망이다. 2002년 선대위 핵심인물로 구성된 `함덕회` 멤버들도 이 전 총재 측에 설 것으로 보인다. 양정규 하순봉 김기배 신경식 최돈웅 전 의원 등이 포함된다. 강삼재 전 사무총장과 창사랑에 관여하고 있는 백승홍 전 의원도 `창의 사람`으로 분류되며, 정인봉 변호사도 명단에 오르내린다. 대표적 `친박` 인사인 유승민 의원은 2002년 당시 여의도연구소장으로서 이 전 총재의 정책을 책임졌던 만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전 총재 특보로 정계에 입문한 나경원 대변인, 총재 비서실장을 지낸 김무성 최고위원 등은 이 전 총재 편에 서기 어려운 형편이다.

[설진훈 기자 / 이진명 기자 / 전정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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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7&no=60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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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보트 [casting vote]

합의체(合議體) 의회에서 표결 결과 가부 동수인 경우에 의장이 가지는 결정권을 말하며 의장이 표결권 또는 결정권을 갖는 것은 각 합의체의 규칙과 관습에 따라서 다르다.

한국에서는 국회의장은 캐스팅보트를 가지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하원의장은 표결권만을 보유하며, 상원의장은 어느 것도 가지지 않는다. 프랑스 의회 의장은 양쪽 모두 보유하지 않는다.

캐스팅보트는 2대정당의 세력이 거의 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때 제3당이 표결을 좌우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리고 세력이 양쪽으로 나뉘어서 균형을 이룬 경우, 대세를 좌우할 열쇠를 쥔 나머지 표를 가리키기도 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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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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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구글-야후 등에 접속하면 바이두로 강제 이동
“엽기적” 한목소리…미국 달라이라마 수상 의식한 듯
현지 관계자 “DNS 수동으로 바꾸면 정상 접속 가능”


서명덕 기자 mdseo@chosun.com 
입력 : 2007.10.19 11:37 / 수정 : 2007.10.1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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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검색 창이 바이두로 강제 이동된 화면(사진 위)과 구글 검색에 접속할 수 없는 오류 화면(사진 아래) / 해외 중국 네티즌 및 blogkim.com 제공

중국이 자국 내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百度, http://baidu.com) '를 제외한 모든 해외 검색엔진에 대해 단순 차단을 넘어 '강제 재전송(리다이렉션)'하는 방식으로 접속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제적인 논란이 일고 있다.

19일 조선일보가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중국 현지 인터넷 대부분 회선에서 중국 외 검색엔진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네이버, 다음, 구글, 마이스페이스, 플리커, 윈도 라이브 등에서 검색하면 모두 중국 내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의 페이지로 강제 이동된다(사진 위). 인터넷 망이나 회선 접속 위치에 따라 해외에 서버를 둔 웹서비스에 접속이 끊어지는 현상도 번갈아가며 발생하고 있다(사진 아래).

현지 체류 중인 한국인은 “며칠 전 중국 회사 사무실 PC에서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며 “네이버, 다음 등 대부분 해외 검색엔진이 ‘바이두’로 돌아가 버려 황당했다”고 말했다.

다른 한 한국인은 “임시적 고장인지, 아니면 해킹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일인지 잘 모르겠다”며 “아직 인터넷 회선 제공업체에서는 별 다른 말이 없다”고 황당해 했다.

또 다른 한국인은 “인터넷 통제가 이뤄지는 중국에서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며 “DNS을 수동으로 바꾸면 정상 접속이 가능하다”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구글 현지 대변인 역시 언론과 인터뷰에서 “Google.cn 도메인과 다른 검색엔진들 상당수가 중국에서 차단되고, 트래픽이 타사로 강제 이동되는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MS 대변인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조사중”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AFP, 컴퓨터월드 등 주요 외신들도 18일(현지시각) 일제히 이 소식을 전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에서 현재 구글, 야후,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이 운영하는 검색엔진에 접속하면 바이두 검색 결과로 모조리 이동한다. 언론들은 ‘미국 웹사이트들의 트래픽이 납치됐다(US search engines hijacked in China)’며 집중 언급하고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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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만난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라마(사진 오른쪽)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 美 백악관 제공


바이두로 트래픽이 돌아가고 있지만 이는 바이두가 개입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 보다 중국 정부 당국이 해외 접속을 막기 위해 이러한 엽기적인 조치를 강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미국 의회가 17일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Dalai Lama)에게 미국 민간 최고의 영예인 골드메달을 수여한 것에 반발해 내린 조치일 것이라는 해외 전문가들의 분석이 유력하다. 심지어 중국은 18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이번 사태는 중·미관계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할 것”이라며 주중 미 대사를 소환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

이 밖에도 최근 구글 비디오에서 중국 내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천안문 광장 사태’ 동영상이 노출되는 사고도 발생한 바 있다. 또한 최근 선보인 유튜브 중국어판(홍콩 및 대만)이 접속 차단된 것도 사태 확대에 한 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 던컨 라일리(Duncan Riley) 테크크런치닷컴(http://www.techcrunch.com) 편집자는 “중국 당국이 서구권 검색엔진과 전쟁을 선포한 것”이라며 “이제는 (불만이 있는 웹사이트들을) 막는 것에서 모자라, 자국 내 업체로 트래픽을 재전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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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0/19/20071019005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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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보다 좋은 노력상

8년 째, 홈페이지 하나 없이,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의 강추만으로 밀려드는 방송, 강의요청을 하루에 20건씩, 미안하지만 거절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건 청중들 감성의 현을 건드리기 때문인가 봅니다. 99%는 멍청하지만 특별한 내 1%가 재미와 감동을 주고 내 가치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조건으로만 말하자면 나는 언제든 최악입니다. 얼굴 안되지, 나이 많지, 운전도 못하지, 외국에는 나가 본 적도 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에게 노력상을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어디에 가더라도 당당합니다. 노벨상보다 더 근사한 상은 노력상입니다.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대학생이던 20대 때는 가난해서 학비를 벌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학생회 활동을 했는데 총학생회 학예부장이었습니다. 이화여대 교지 편집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내성적이어서 아주 얌전했고 신비의 심볼일 정도였습니다. 말하는 것이 너무나 수줍어서 일기를 꾸준히 쓰며 글로 풀었더니 글 솜씨가 늘어 동인 시화전을 열었던 기억도 납니다.

환경이 안 좋아서인지 항상 위축되어 있었고 젊은이답지 않게 우울기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좋은 멘토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전혜린이 한 개의 코드이기도 했던 그 때는 항상 검정색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메일을 받았는데, 그 때 <내가 하지 말아야 할 10가지>를 쪽지에 써서 다녔답니다.

웃을 때 입 벌리지 말고 웃기, 말을 많이 하지 말기 등 그 시대에는 그런 것이 미덕이기도 했고 나의 단면을 엿보이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소리 내어 웃으라고 강연하며 뻔뻔하게 살라고 충고합니다. 나는 현실적응자라 그런지 시대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습니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바라본 남편은 그때 우수에 젖은 왕자였습니다. 최대한 멋있게 보았습니다만, 살아보니 전혀 아닙니다. 최악의 조건이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말리는 결혼이었지만, 사랑에 눈 먼 나는 결혼하고야 말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산동네에 근근이 10평짜리 집을 마련했는데, 난생 처음 집이 생기고 집문서를 쥔 남편은 흥분한 나머지 집을 잡히고 사업을 시작하고야 말았고 두 달 만에 망했습니다.

남편의 사업실패로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창원이 아닌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삽니다. 지금은 남편에게 날마다 감사장을 주어 마땅합니다. 그 때 망한 남편 덕에 지금의 최윤희가 있는 것이니까요.



열려라 참깨!

너무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잘 살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완전히 망하니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때 스스로에게 문제를 냈습니다. “최윤희, 주관식은 가혹할 테니 객관식으로 내줄게. 1 이혼을 해 2 가족동반 자살을 해 3 묻지마 타락 4 새 출발, 몇 번?”

1번, 이혼이 원샷으로 됐으면 날마다 할 텐데, 구청에 동사무소에, 차라리 살고 말지. 2번, 신나게 놀고 있는 애들을 불렀습니다. 신나게 놀다가 엄마의 부름에 달려온 아이들은 다시 놀러 나갈 생각에 ‘죽겠다’ 말할 채비인 엄마를 재촉하는데, 재미있어 죽겠는 애들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3번, 타락도 얼굴이 받쳐주어야 하겠고, 4번을 답으로 찍었습니다.

마음처럼 간사하고 마음처럼 신비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마법의 버튼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휴대폰만 해도 수 십 개, 수 백 개의 기능버튼이 장착되어 있지만 몇 가지 기능만 사용하듯, 그 버튼을 평생 한 번도 눌러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99.9%일 것입니다. 나는 4번, 새 출발이라는 버튼을 눌렀고 마법이 일어났습니다. 상황은 똑같았지만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신문을 뒤적이기 시작했고, 거기서 주부사원 모집광고를 발견하고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카피라이터 ^^;;

카피라이터가 뭔지도 모르고 갔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시험이었는데, 잘하는 것은 없지만 남과 똑 같은 것, 평범한 건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나였습니다. 가족사로 시작하는 천편일률적인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집안’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내 책임 속에서 무엇을 했나 하는 것입니다. 반말로 시작한 자기소개서가 너무나 특이해서 1331명 중 1명의 카피라이터로 합격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온 가족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카피라이터가 무슨 말인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고민한 끝의 결론은 복사하는 것과 관계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기계치인 나는 어떡하나 고민이었지만 별 수가 없던 나는 ‘복사’를 하러 갔습니다. 모름지기 카피는 광고의 꽃이고, 카피라이터라면 백합 같은 멋진 여자이리라 기대하던 직원들은 마흔이 다 된,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를 보고는 뒤집어졌습니다.



나는 콜라 !

보통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에 자존심 상해 하지만, 상대가 나를 무시하는 것 자체는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닙니다. 무시를 이겨내지 못하는 일이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중도포기 만한 치욕이 없습니다. 그래서 카피라이터가 뭔지도 모르고 나타난 아줌마를 남들이 무시하는 것이 슬펐지만 아무런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콜라인데 사이다 사이다 한다고 해도 나는 콜라입니다. 날마다 화장실에 가서 울면서 광고서적을 책상에 쌓아 놓고 이면지에 베끼기 시작했습니다, 밥도 안 먹고 몰두하자 나를 무시하던 사람들이 날 불쌍히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밥은 먹으셔야죠?’

나를 왕따시키던 사람들이 영어로 도배된 광고용어를 쓸 때 죽기살기로 공부했습니다. 6개월 즈음 지나니 광고에 대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없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내 옆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리게 되고 나랑 업무협의를 하러 번호표를 뽑듯 순서를 정해 기다리는 것이 그 시절의 풍경이었습니다. 진실과 성실, 노력의 끝은 ‘틀니’ 해 줄 테니 정년퇴직 때까지 다니라는 얘기였습니다



인생, 뒤집기 한 판

그렇게 인생의 샅바를 잡고 뒤집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습니다. 편하게만 가려고 쉽게만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름길이 아닌 꼬불꼬불 오솔길이 인생의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습니다. 된장, 청국장이 몸에 좋은 건 사정없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고생 한 번 없이 잘 풀리면 뺀질뺀질 인간미가 없게 마련입니다. 소위 성공한 사람이 남을 짓밟고 내 것만 챙기고 별 것도 아닌 것에 징징대고 감사할 줄 모른다면 실패입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느낌입니다. 학교 덜 나오면 어떻습니까?

발효한 인간에게는 좋은 향기가 나게 마련입니다. 고통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 갈 필요는 없지만, 다가온 고통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 고통을 이겨낼 힘을 가졌습니다. <밀리언달러 베이비>라는 영화에 나오는, ‘권투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스포츠다. 그러나 그 고통을 즐기기만 한다면 너 속에서 신비한 힘이 솟아날 것이다’라는 대사를 기억합니다. 권투를 인생으로 치환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고통을 즐길 수만 있다면 고통을 이기는 신비한 힘도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내가 왜 나가요?

뭔지도 모르고 시작한 카피라이터를 그만 두게 된 건 IMF 위기 때였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떠나는 직원들을 보니 너무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그만두면 젊은 사람 3명 구하겠구나 싶었고 박수칠 때 떠나자는 심정으로 바로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이 98년 1월이었습니다.

내 인생은 방송, 경찰서, 감옥과는 상관없을 줄 알았습니다. 직장을 그만둔 후 ‘행복 그거 얼마에요?’라는 책을 내고 MBC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무지하던 나는 ‘내가 왜 나가요’ 했겠지요. 그 때 옆에 있던 출판사 직원이 ‘책을 내면 방송에 나가려고 로비하는 판’이라기에, 또 남의 말 잘 듣는 나는 ‘알았어’ 하며 나갔습니다. 내 얼굴로 말하자면 세 글자로 ‘비호감’ 네 글자로 ‘옳지 않아’ 영어로는 ‘아임쏘리’고, 미인박명이라면 나는 불사조 입니다. ^^

그 얼굴이 난감할까 봐 메이크업 하시는 분에게 미리 말했습니다. ‘아이들 놀이터마냥 넓지요이? 마음대로 놀아보쇼이!’하고. 정말 마음대로 놀아 버렸습니다. 그 이후 아침마당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아침마당은 직장이 없는 전국민이 보는 프로그램입니다. 피디와 작가를 만났고 피디에게 조건을 걸었습니다. 조건이란, 화장 안 하게 해달라는 거였고 그래서 맨 얼굴로 나갔습니다. 친구들은 맨 얼굴 때문에 못 봐주겠다고 했지만, 방송가에는 개그맨보다 더 웃기는 여자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스무 개도 넘는 라디오 방송요청, TV출연, 강의요청, 그 때부터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너 정말 오리지널 최윤희 맞어?”

처음 방송할 때는 너무 떨렸습니다. 왜 떨릴까 생각해보니 잘 보이고 싶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10정도의 사람이라면 5정도로만 보이자 결정했습니다. 소위 망가지려고 작정을 하고 되려 내 비리를 까발리고 다니니 사람들은 그것을 더 재미있어 했습니다.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편하게 방송을 하고 방송 밖에서도 똑같이 편합니다. 다르게 보여놓고 살면 현실에서 불편하게 됩니다.

방송에 나간 뒤 “너 정말 오리지널 최윤희 맞아?” 수줍음이 많아서 말 한마디도 못했던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그렇게 물어 왔습니다. 회사동료들도 산 증인인데, 내게 노래를 시키는 건 모기허리에 권총 채우기보다 힘들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너라고 생각하는 그 너는 정말 ‘너’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수많은 캐릭터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 어딘가에서 오프라 윈프리가 잠자고 있을 지 모릅니다.  21세기를 넘어 23세기형 트랜스포머가 되십시오. 자기인생은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트랜스포머가 되라

나는 20대 때 책을 정말 많이 읽었습니다. 하루에 두 권씩 읽었는데 밥보다 맛있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그 때의 책들을 보면 밑줄, 별표, 빽빽한 메모들,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벽돌쌓기처럼 튼튼하게 축적된 내 컨텐츠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읽기보다는 많이 쓰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50대까지 책을 무지하게 읽었습니다. 밥을 하면서도 가스 불 앞에서 책을 읽었고 심지어 버스정류소에 가며 책을 읽다가 부딪친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많이 봅니다. 바쁜데 어떻게 보냐고 하지만 바쁘다는 건 핑계입니다. 일요일 영화를 본다는 목적이 생기면 아홉 시부터 부지런을 떨게 됩니다. 목적이 없으면 뒹굴 거리게 되지만 목표가 생기면 부지런히 움직이게 됩니다. 5편을 이어 보기도 하는데 혹자는 엉키지 않냐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트랜스포머가 됩니다.



시간은 고무줄


부지런하게 틈새시간을 활용한다면 서른 시간, 마흔 시간을 살 수 있습니다. 전업주부로 지냈던 38살까지는 굉장히 게을렀습니다. 맨날 늦게 일어나는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그 때는 물음표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느낌표 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3시에서 3시반 사이에 일어나는데, 라디오 고정 7개, 방송 4개, 강의 2~3개로 하루가 쫀득쫀득합니다. 그렇게 해도 영화 다 보고 사람들도 만납니다. 바쁘다는 건 핑계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태세로 살아야 하는데, 할 수 없다는 건 그저 하기 싫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루살이를 벤치마킹 해야 합니다. 하루 밖에 없기 때문에 완벽하게 최선을 다해서 삽니다. 내일이 있다는 생각으로 미루는 건 절대 안됩니다. 악마의 달력에는 날마다 ‘내일’이지만, 천사의 달력에는 ‘바로 지금’뿐입니다. 간디 선생의 말씀을 빌어 오면 ‘오늘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야’ 합니다.



보라빛 가치, 싼루오션

20대에는 고민도 많이 해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는 ‘젊은이여!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도전하라. 그것이 젊음의 특권이다’라고 했습니다. 도전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청춘은 바보입니다. 재일기업인 손정희 씨도 몇 십 억 손해를 끼칠지언정 도전하는 사람은 봐줄 수 있지만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사원은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십시오. 옛날에는 나를 ‘판다’는 것이 모욕이었지만 현대에는 나를 ‘팔지 못하는’ 것이 모욕입니다. 상품으로가 아닌 작품으로 팔아야 합니다. 작품으로 판다는 것은 과대포장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컨셉트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포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보시겠지만 내 패션전략은 ‘싼루오션’입니다. 어디에서도 당당함으로 차별화합니다. 명품타령은 골 빈 사람들의 비명입니다. 인간명품이 되어야지, 정신이 짝퉁인데 명품을 걸친들 무슨 소용일까요, 최고의 복장은 언제나 표정입니다. 하물며 패션스타일에서도 자기만의 컨셉을 찾아야 합니다. ‘보랏빛 소’가 되어야 합니다.

끌리는 대로 사십시오. 그러려면 편견의 벽을 넘어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20대에는 미쳐야 합니다. 나를 다 던져서 미쳐야 미치고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합니다

나는 지금 20대


사람들이 묻습니다. 긍정적으로 살라는 말씀이시죠? 제가 답합니다. ‘천만에요, 긍정이라는 말은 부족합니다!’ 너무 힘든 때라, 초긍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나이에도 나는 인생이 재미있고 흥미진진합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악이란 지루함이다’라고 했습니다. 행복하게 신나게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도 유쾌한 에너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제일 하고 싶었던 세 가지를 하고 삽니다. 방송, 칼럼, 강의. 80대가 지난 할머니가 맨 얼굴로 나와 인생상담을 하는 외국 프로그램이 있답니다. 더 나이가 들면 나도 그처럼 내 방식의 유쾌한 인생상담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벽이 너무도 많았던 20대가 후회스럽고 다시 20대가 온다면 그렇게 살지 않겠지만 너무나 다행하게도 지금 나는 20대처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