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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19 나의 20대 : 방송인 최윤희 1



노벨상보다 좋은 노력상

8년 째, 홈페이지 하나 없이,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의 강추만으로 밀려드는 방송, 강의요청을 하루에 20건씩, 미안하지만 거절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건 청중들 감성의 현을 건드리기 때문인가 봅니다. 99%는 멍청하지만 특별한 내 1%가 재미와 감동을 주고 내 가치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조건으로만 말하자면 나는 언제든 최악입니다. 얼굴 안되지, 나이 많지, 운전도 못하지, 외국에는 나가 본 적도 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에게 노력상을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어디에 가더라도 당당합니다. 노벨상보다 더 근사한 상은 노력상입니다.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대학생이던 20대 때는 가난해서 학비를 벌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학생회 활동을 했는데 총학생회 학예부장이었습니다. 이화여대 교지 편집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내성적이어서 아주 얌전했고 신비의 심볼일 정도였습니다. 말하는 것이 너무나 수줍어서 일기를 꾸준히 쓰며 글로 풀었더니 글 솜씨가 늘어 동인 시화전을 열었던 기억도 납니다.

환경이 안 좋아서인지 항상 위축되어 있었고 젊은이답지 않게 우울기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좋은 멘토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전혜린이 한 개의 코드이기도 했던 그 때는 항상 검정색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메일을 받았는데, 그 때 <내가 하지 말아야 할 10가지>를 쪽지에 써서 다녔답니다.

웃을 때 입 벌리지 말고 웃기, 말을 많이 하지 말기 등 그 시대에는 그런 것이 미덕이기도 했고 나의 단면을 엿보이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소리 내어 웃으라고 강연하며 뻔뻔하게 살라고 충고합니다. 나는 현실적응자라 그런지 시대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습니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바라본 남편은 그때 우수에 젖은 왕자였습니다. 최대한 멋있게 보았습니다만, 살아보니 전혀 아닙니다. 최악의 조건이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말리는 결혼이었지만, 사랑에 눈 먼 나는 결혼하고야 말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산동네에 근근이 10평짜리 집을 마련했는데, 난생 처음 집이 생기고 집문서를 쥔 남편은 흥분한 나머지 집을 잡히고 사업을 시작하고야 말았고 두 달 만에 망했습니다.

남편의 사업실패로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창원이 아닌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삽니다. 지금은 남편에게 날마다 감사장을 주어 마땅합니다. 그 때 망한 남편 덕에 지금의 최윤희가 있는 것이니까요.



열려라 참깨!

너무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잘 살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완전히 망하니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때 스스로에게 문제를 냈습니다. “최윤희, 주관식은 가혹할 테니 객관식으로 내줄게. 1 이혼을 해 2 가족동반 자살을 해 3 묻지마 타락 4 새 출발, 몇 번?”

1번, 이혼이 원샷으로 됐으면 날마다 할 텐데, 구청에 동사무소에, 차라리 살고 말지. 2번, 신나게 놀고 있는 애들을 불렀습니다. 신나게 놀다가 엄마의 부름에 달려온 아이들은 다시 놀러 나갈 생각에 ‘죽겠다’ 말할 채비인 엄마를 재촉하는데, 재미있어 죽겠는 애들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3번, 타락도 얼굴이 받쳐주어야 하겠고, 4번을 답으로 찍었습니다.

마음처럼 간사하고 마음처럼 신비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마법의 버튼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휴대폰만 해도 수 십 개, 수 백 개의 기능버튼이 장착되어 있지만 몇 가지 기능만 사용하듯, 그 버튼을 평생 한 번도 눌러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99.9%일 것입니다. 나는 4번, 새 출발이라는 버튼을 눌렀고 마법이 일어났습니다. 상황은 똑같았지만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신문을 뒤적이기 시작했고, 거기서 주부사원 모집광고를 발견하고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카피라이터 ^^;;

카피라이터가 뭔지도 모르고 갔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시험이었는데, 잘하는 것은 없지만 남과 똑 같은 것, 평범한 건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나였습니다. 가족사로 시작하는 천편일률적인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집안’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내 책임 속에서 무엇을 했나 하는 것입니다. 반말로 시작한 자기소개서가 너무나 특이해서 1331명 중 1명의 카피라이터로 합격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온 가족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카피라이터가 무슨 말인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고민한 끝의 결론은 복사하는 것과 관계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기계치인 나는 어떡하나 고민이었지만 별 수가 없던 나는 ‘복사’를 하러 갔습니다. 모름지기 카피는 광고의 꽃이고, 카피라이터라면 백합 같은 멋진 여자이리라 기대하던 직원들은 마흔이 다 된,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를 보고는 뒤집어졌습니다.



나는 콜라 !

보통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에 자존심 상해 하지만, 상대가 나를 무시하는 것 자체는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닙니다. 무시를 이겨내지 못하는 일이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중도포기 만한 치욕이 없습니다. 그래서 카피라이터가 뭔지도 모르고 나타난 아줌마를 남들이 무시하는 것이 슬펐지만 아무런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콜라인데 사이다 사이다 한다고 해도 나는 콜라입니다. 날마다 화장실에 가서 울면서 광고서적을 책상에 쌓아 놓고 이면지에 베끼기 시작했습니다, 밥도 안 먹고 몰두하자 나를 무시하던 사람들이 날 불쌍히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밥은 먹으셔야죠?’

나를 왕따시키던 사람들이 영어로 도배된 광고용어를 쓸 때 죽기살기로 공부했습니다. 6개월 즈음 지나니 광고에 대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없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내 옆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리게 되고 나랑 업무협의를 하러 번호표를 뽑듯 순서를 정해 기다리는 것이 그 시절의 풍경이었습니다. 진실과 성실, 노력의 끝은 ‘틀니’ 해 줄 테니 정년퇴직 때까지 다니라는 얘기였습니다



인생, 뒤집기 한 판

그렇게 인생의 샅바를 잡고 뒤집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습니다. 편하게만 가려고 쉽게만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름길이 아닌 꼬불꼬불 오솔길이 인생의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습니다. 된장, 청국장이 몸에 좋은 건 사정없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고생 한 번 없이 잘 풀리면 뺀질뺀질 인간미가 없게 마련입니다. 소위 성공한 사람이 남을 짓밟고 내 것만 챙기고 별 것도 아닌 것에 징징대고 감사할 줄 모른다면 실패입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느낌입니다. 학교 덜 나오면 어떻습니까?

발효한 인간에게는 좋은 향기가 나게 마련입니다. 고통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 갈 필요는 없지만, 다가온 고통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 고통을 이겨낼 힘을 가졌습니다. <밀리언달러 베이비>라는 영화에 나오는, ‘권투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스포츠다. 그러나 그 고통을 즐기기만 한다면 너 속에서 신비한 힘이 솟아날 것이다’라는 대사를 기억합니다. 권투를 인생으로 치환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고통을 즐길 수만 있다면 고통을 이기는 신비한 힘도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내가 왜 나가요?

뭔지도 모르고 시작한 카피라이터를 그만 두게 된 건 IMF 위기 때였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떠나는 직원들을 보니 너무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그만두면 젊은 사람 3명 구하겠구나 싶었고 박수칠 때 떠나자는 심정으로 바로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이 98년 1월이었습니다.

내 인생은 방송, 경찰서, 감옥과는 상관없을 줄 알았습니다. 직장을 그만둔 후 ‘행복 그거 얼마에요?’라는 책을 내고 MBC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무지하던 나는 ‘내가 왜 나가요’ 했겠지요. 그 때 옆에 있던 출판사 직원이 ‘책을 내면 방송에 나가려고 로비하는 판’이라기에, 또 남의 말 잘 듣는 나는 ‘알았어’ 하며 나갔습니다. 내 얼굴로 말하자면 세 글자로 ‘비호감’ 네 글자로 ‘옳지 않아’ 영어로는 ‘아임쏘리’고, 미인박명이라면 나는 불사조 입니다. ^^

그 얼굴이 난감할까 봐 메이크업 하시는 분에게 미리 말했습니다. ‘아이들 놀이터마냥 넓지요이? 마음대로 놀아보쇼이!’하고. 정말 마음대로 놀아 버렸습니다. 그 이후 아침마당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아침마당은 직장이 없는 전국민이 보는 프로그램입니다. 피디와 작가를 만났고 피디에게 조건을 걸었습니다. 조건이란, 화장 안 하게 해달라는 거였고 그래서 맨 얼굴로 나갔습니다. 친구들은 맨 얼굴 때문에 못 봐주겠다고 했지만, 방송가에는 개그맨보다 더 웃기는 여자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스무 개도 넘는 라디오 방송요청, TV출연, 강의요청, 그 때부터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너 정말 오리지널 최윤희 맞어?”

처음 방송할 때는 너무 떨렸습니다. 왜 떨릴까 생각해보니 잘 보이고 싶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10정도의 사람이라면 5정도로만 보이자 결정했습니다. 소위 망가지려고 작정을 하고 되려 내 비리를 까발리고 다니니 사람들은 그것을 더 재미있어 했습니다.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편하게 방송을 하고 방송 밖에서도 똑같이 편합니다. 다르게 보여놓고 살면 현실에서 불편하게 됩니다.

방송에 나간 뒤 “너 정말 오리지널 최윤희 맞아?” 수줍음이 많아서 말 한마디도 못했던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그렇게 물어 왔습니다. 회사동료들도 산 증인인데, 내게 노래를 시키는 건 모기허리에 권총 채우기보다 힘들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너라고 생각하는 그 너는 정말 ‘너’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수많은 캐릭터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 어딘가에서 오프라 윈프리가 잠자고 있을 지 모릅니다.  21세기를 넘어 23세기형 트랜스포머가 되십시오. 자기인생은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트랜스포머가 되라

나는 20대 때 책을 정말 많이 읽었습니다. 하루에 두 권씩 읽었는데 밥보다 맛있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그 때의 책들을 보면 밑줄, 별표, 빽빽한 메모들,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벽돌쌓기처럼 튼튼하게 축적된 내 컨텐츠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읽기보다는 많이 쓰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50대까지 책을 무지하게 읽었습니다. 밥을 하면서도 가스 불 앞에서 책을 읽었고 심지어 버스정류소에 가며 책을 읽다가 부딪친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많이 봅니다. 바쁜데 어떻게 보냐고 하지만 바쁘다는 건 핑계입니다. 일요일 영화를 본다는 목적이 생기면 아홉 시부터 부지런을 떨게 됩니다. 목적이 없으면 뒹굴 거리게 되지만 목표가 생기면 부지런히 움직이게 됩니다. 5편을 이어 보기도 하는데 혹자는 엉키지 않냐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트랜스포머가 됩니다.



시간은 고무줄


부지런하게 틈새시간을 활용한다면 서른 시간, 마흔 시간을 살 수 있습니다. 전업주부로 지냈던 38살까지는 굉장히 게을렀습니다. 맨날 늦게 일어나는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그 때는 물음표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느낌표 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3시에서 3시반 사이에 일어나는데, 라디오 고정 7개, 방송 4개, 강의 2~3개로 하루가 쫀득쫀득합니다. 그렇게 해도 영화 다 보고 사람들도 만납니다. 바쁘다는 건 핑계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태세로 살아야 하는데, 할 수 없다는 건 그저 하기 싫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루살이를 벤치마킹 해야 합니다. 하루 밖에 없기 때문에 완벽하게 최선을 다해서 삽니다. 내일이 있다는 생각으로 미루는 건 절대 안됩니다. 악마의 달력에는 날마다 ‘내일’이지만, 천사의 달력에는 ‘바로 지금’뿐입니다. 간디 선생의 말씀을 빌어 오면 ‘오늘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야’ 합니다.



보라빛 가치, 싼루오션

20대에는 고민도 많이 해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는 ‘젊은이여!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도전하라. 그것이 젊음의 특권이다’라고 했습니다. 도전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청춘은 바보입니다. 재일기업인 손정희 씨도 몇 십 억 손해를 끼칠지언정 도전하는 사람은 봐줄 수 있지만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사원은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십시오. 옛날에는 나를 ‘판다’는 것이 모욕이었지만 현대에는 나를 ‘팔지 못하는’ 것이 모욕입니다. 상품으로가 아닌 작품으로 팔아야 합니다. 작품으로 판다는 것은 과대포장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컨셉트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포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보시겠지만 내 패션전략은 ‘싼루오션’입니다. 어디에서도 당당함으로 차별화합니다. 명품타령은 골 빈 사람들의 비명입니다. 인간명품이 되어야지, 정신이 짝퉁인데 명품을 걸친들 무슨 소용일까요, 최고의 복장은 언제나 표정입니다. 하물며 패션스타일에서도 자기만의 컨셉을 찾아야 합니다. ‘보랏빛 소’가 되어야 합니다.

끌리는 대로 사십시오. 그러려면 편견의 벽을 넘어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20대에는 미쳐야 합니다. 나를 다 던져서 미쳐야 미치고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합니다

나는 지금 20대


사람들이 묻습니다. 긍정적으로 살라는 말씀이시죠? 제가 답합니다. ‘천만에요, 긍정이라는 말은 부족합니다!’ 너무 힘든 때라, 초긍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나이에도 나는 인생이 재미있고 흥미진진합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악이란 지루함이다’라고 했습니다. 행복하게 신나게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도 유쾌한 에너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제일 하고 싶었던 세 가지를 하고 삽니다. 방송, 칼럼, 강의. 80대가 지난 할머니가 맨 얼굴로 나와 인생상담을 하는 외국 프로그램이 있답니다. 더 나이가 들면 나도 그처럼 내 방식의 유쾌한 인생상담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벽이 너무도 많았던 20대가 후회스럽고 다시 20대가 온다면 그렇게 살지 않겠지만 너무나 다행하게도 지금 나는 20대처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쑨) :